그 이름의 사랑

육체가 숨는 교권 -- 그들의 정형화 공식

신성 LED 십자가 2008. 3. 7. 20:10

 

 

평생 성경 공부만하고 문걸어 잠그고 기도만 하면서 이웃들과는 교제함 없이 모인 사람들만 서로 독려하면서 자신들의 공동체만 위하면서 살아도 구원과 은혜가 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굳이 나서서 부정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중에는 사실 자신의 육체를 섬기며 세상의 부를 축재하며 교권을 강화해 자신만의 왕국을 세우는 이들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구원을 우리 맘대로 정형화 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않된다.

 

정형화는 참으로 무서운 죄이다. 홍해를 건너 금 송아지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든자들과 추종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섬겼다고 끔찍한 죽음을 당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참된 모습을 많은 이들이 외면하게하고 또 자신들이 원하는 바로 하나님을 외곡시켰지 때문이다. 

 

제사장과 랍비들이 메시아를 그토록 갈망했음에도 불구하고,왜 그리스도를 못 알아 봤을까?

 

그것은 정형화 된 그들의 메시아 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덕위에서 노상 기다리고 있으면 어디선가인지는 모르지만 광야를 건어오는 새로운 뉴 페이스일줄 알았던거다.

우리 옆집 내가 걔 애기때 그집 놀러가 똥 기저귀 갈아준 요셉에 아들 예수라는건 너무 기대에 안맞는 뽀다구 안나는 형상이었던거다.

 

구원을 구제 받는 듯이 생각하는 의식이 지금의 통상적인 입장이다. 사후에나 있는것, 종말이후에나 있는것이라고 생각하는것,또 하나님이 하나하나 구별해서 자리를 옮기는 것,결론적인 것,공간적으로 불 신앙자들과 다른 공간을 차지하는것이라는 개념이 그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많은 부분에서 악인과 의인에게로의 동일한 은혜 속에 다른 결과가 써있는 경우는 무엇에 대한 설명일까?

 

 같은 길 위에서 누구는  은혜로 누구는 고통으로 표현된것을 보았을때 우리의 구원이 그러하면 어찌 할 것인가?

 

예수님께서 열매 맺지 못한 나무를 잘라내시겠다는 말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구원과 멸망의 표현이라면 우리는 이대로 살 수가 있는가 말이다.

 

어쩌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나를 향하신 하나님과의 친밀하고 개인적인 만남으로 완성되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다들 그런거 라고 하겠지!!

 

그럼 왜 세례할때 수십명씩 일괄 예스 로 대답하는 질문 몇마디로 다 통과 시키지?

 

6개월 교리교육 시간에 전쳬 개근했으니까? 사실 그런 경우도 별로 없는데...

 

형상을 만들지 말라하신 이유가 각각 개인들에게 다른 질문과 다른 모습과 과정과 서로 다른 순종과 대답이 있어서가 아닐까?

 

먹는자는 주를 위해 먹고,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해 먹지 안는다라고 한 사도의 말,성경의 기록이 생각난다.

 

하여튼 육체의 배를 섬기며, 이땅에 지을 예배당 건물의 빨간 벽돌 매입을 섬기며, 더 강력한 재력과 영향력을 갈망하는 이들에게는 정형화된 그네들의 교권 옹호의 교리가 따로있다.는 것을 형제들 잊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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