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목사로서 사람을 죽일 수 있느냐?”, “한 미치광이가 큰 차를 몰고 대로를 질주하고 있다. 내가 목사로서 할 일은 죽은 사람들의 시신이나 거두어 장례를 치르는 것이 아니라 미치광이를 차에서 끌어내려 제 자리로 갖다 놓겠다.”
위의 이야기는 신앙을 가진 양심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행동하는 신앙인이자, 실천하는 지식이었던 ‘디트리히 봅훼퍼’ 목사의 법정 최후 진술이다. 언제 들어도 많은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심금을 울린다. 2치 대전이 일어난 후 히틀러 파쇼 집단의 ‘광란의 질주’에 독일의 모든 지성은 숨 죽이고 있었다. 독일 언론이 조용했고 먹물들은 입 다물고 눈치만 보고 있었으며, 거대 조직인 카톨릭교회는 나찌와 ‘암묵의 밀약’을 즐기면서 타협하고 있었다. 나치의 금괴를 로마 교황청으로 빼 돌려 떡고물을 챙겼다는 공공연한 비밀도 있다. (무솔리니와의 뒷거래는 굳이 거론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독일의 개신교 역시 대다수는 조용했으나 ‘디트리히 본훼퍼’를 중심으로 한 ‘고백교회’는 지하에서 치열하게 투쟁하면서도 ‘전쟁이 끝난 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까지 했다. ‘고백교회’의 그런 피눈물을 결코 헛되지 전쟁이 끝난 후 나치청산의 원동력이 되었으며, 세계를 향해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다. 특히 유대인들에 대한 대량학살에 대한 사죄는 고백교회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고 할 정도다. 전쟁 후 복구를 하고 경제가 자리를 잡아갈 무렵부터 독일교회협의회 ‘제3세계개발처(RZE)’를 통해 많은 제 3세계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했다. 한국의 ‘종로5가’로 부르는 ‘기독교회관’과 기독교방송(CBS), 크리스챤아카데미 등은 독일교회의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십자가 행진이 아닌 ‘촛불과 함께 하는 것’을 국민들이 보고 싶어한다는 걸 종교인들은 알아야 한다. (사진:오마이뉴스)
6월 30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시국미사를 시작으로 막힌 서울광장이 열리고, 7월 3일 한국기독교회협의회 ‘정의평화위원회’ 주최의 ‘시국기도회’와 실천승가단을 중심으로 한 불교계의 시국법회가 열렸다. 그 동안 이명박의 ‘광란의 질주’에 맞서 연일 촛불을 들고 싸우느라 지쳐 있었던 시민들에게 다소나마 위안이 되었다. 특히 7월 5일 촛불집회에는 1천여명의 기독교신자들이 즉석에서 성가대를 꾸려 노래를 시민들에게 선사하며 많은 박수를 받았다. 성직자들이라 부르는 종교인들이 최소한 2~3주는 시청 앞을 지키고 있을 줄 알았는데 6월 6일 사제단이 미사 후 철수하고, 개신교는 저녁에 나오려 했는데 서울시의 강제철거로 ‘촛불교회’ 마저 뜯기는 수모를 당했다. 혹시나 하며 기대를 했는데 역시나 종교 특유의 기회주의적 본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말았다. 교회가 파괴당한 그 자리에서 ‘항의기도회’를 하면서 끝까지 불의에 저항하는 게 당연하건만 어찌된 영문인지 기독교운동 진영 내부의 교통정리조차 되지 않아 그대로 밀려나 교회 얼굴에 스스로 먹칠을 하고 말았다.
이미 이름 없는 시민들이 ‘절반의 승리’를 쟁취한 마당에 늦게 뛰어들어 적당히 생색이나 내려다 이명박에게 뒤통수를 맞은 셈이다. 한국사회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교회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기독교(신구교)는 제 발로 차 버리고 말았다. “사랑은 불의와 함께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안다면 기독교는 당장 길바닥이나 시잘 집무실 앞에라도 천막을 치고 ‘금식기도’를 하면서 국민들을 향해 ‘촛불과 함께 한다’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대구의 경우 7월 4일 그 얼굴이 그 얼굴인 목사들이 ‘간판만 너 댓개 되는 기독교단체’의 이름으로 ‘시국기도회’를 했다. 촛불집회 후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인 ‘6.10항쟁기념촛불집회’에는 기념사진 찍고 10분짜리 설교만 했다. 7월 8일(화) 불교계의 ‘시국법회’가 촛불집회 장소인 대백 앞에서 열린다고 들었는데 가보니 ‘전날 갑자기 취소’하고 종교계는 빠지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너무 허탈해 할 말을 잊었다.
▲ 광우병위험 미국산쇠고기 수입 전면 재협상 촉구 및 국민무시 이명박 정권 심판 100만 촛불대행진에 참석한 시민들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새로 등장한 ‘명박산성에 꽂힌 태극기와 뒤에 가득 찬 닭장차와 전경들. ‘명박산성’을 넘는 선두에 종교인들이 서야 한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늘 역사 변화에 ‘무임승차’를 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빠지는 기회주의적 속성을 끊임없이 나타난다. 제국주의의 앞잡이 노릇을 한 것은 두말 할 필요조차 없다. 종교개혁은 기독교 내부에서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운동이 아니라 ‘르네상스’라는 사회변혁의 물결에 떠 밀려 살 길을 찾은 전형적인 생색내기용의 ‘무임승차’요 기회주의적 행태를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토마스 뮨쩌’를 중심으로 한 ‘농민반란’과 같이 근본적인 변혁을 시도하려는 세력에게 찬물을 끼얹고 신흥세력으로 떠 오른 시민계급(자본가)과 손잡은 ‘마르틴 루터’나 ‘존 캘빈’ 같은 집단이 종교 개혁의 주도권을 잡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한국교회는 1970년대 암울했던 유신시절 피난처 역할을 했으나 1980년대 이후 민중세력의 변화요구가 용솟음치자 그나마 이웃과 함께 하던 민중교회들 조차 지리멸렬하고 말았다. 노무현 정권 시절 기독교운동은 ‘종로5가’ 인맥을 타고 한 자리하며 호강하다가 다시 교회로 돌아오는 등 아주 추잡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상식이 있는 성적자라면 ‘시국미사’와 ‘시국기도회’를 통해 열린 서울광장을 주인인 시민들에게 돌려주고, 촛불을 끄지 않고 이어가기 위해서라도 그곳에서 버티며 이명박의 ‘광란의 질주’에 쇄기를 박는 일에 함께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몇 일 ‘머물다 가는 나그네’였을 뿐 상처받아 아파하는 이웃과 함께하는 동지가 아니었음을 자신들이 보여주었다. 자신들의 입으로 그렇게 떠들던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닌 비겁한 제사장 짓을 자청했다. 종교인들이 입만 열만 말하는 ‘평화집회’라는 게 미사나 예배 후 그냥 시내 한 바퀴 도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태풍전야의 고요와 태풍의 중심이 조용하다고 고요하다고 부르는 멍청한 인간은 없다. 그것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일 뿐이다. 광우병정국에서 이명박은 ‘만악의 근원’이요 ‘악의 축’이지 그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접대용 발언’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7월 6일(일) 오후에 ‘촛불교회’가 강제철거 당하는 것을 보고 ‘이명박 정부에게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고 한 어느 신부의 말은 너무나도 순진하기 그지 없는 말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은 전과14범이다’며 탄핵해야 한다고 할 때 ‘이명박은 회개(悔改)하라’고 한 목사들은 ‘쥐박이 잡으러 왔다’고 한 10대 청소년들 보다 인식 수준이 한참 떨어져 있음을 증명했다. 이명박은 끌어내려야 할 대상이고, 한나라당은 해체해야할 집단이지 그들에게 일말의 기대라도 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기 그지없는 짓이다. 이제 한국기독교(신구교)의 본질과 한계는 분명히 드러났다. 정의구현사제단과 기독교운동의 바닥을 그대로 보여줬다. 지금이라도 신뢰회복을 하려면 이명박을 끌어내리고 위해 ‘명박산성’을 넘는 선두에 서야 한다.
“종교인도 사법처리 대상”이라고 한진희 경찰이 지껄이더니 바로 다음 날 말을 바꾸는 등 부담을 느끼고 있다. 바로 이 때 ‘명박산성’을 넘고 물대포에 몸으로 맞서고 내려찍는 방패에 “왼뺨을 때리거든 오른쪽 뺨을 갖다 대라”고 한 예수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형상이 파괴당하는 현장에 함께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교회가 설 곳은 사라지고 만다. 어쩌면 이게 기독교가 사는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그런데 돌연 목사 9천여명이 ‘이제 촛불을 꺼야 한다’며 나서 세상으로부터 웃음꺼리를 제공하고 있다. 미친 인간이라 상종조차 하지 않는 서경석이 앞장 서 김준곤을 비롯한 사립학교법개정 반대에 앞장 서 삭박을 강행한 목사들이 설치는 꼴이 가관이다. 개그맨들이 하도 웃기는 인간들이 많아 웃기는 게 직업인 개그맨들이 일자리를 잃지 않을까 걱정이다. 이럴 때 일수록 소수이지만 신뢰회복의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몸을 던져야 한다. 지나간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이야 말로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를 실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일리있는 주장입니다.
해서 믿는 우리가 환기 될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되 올립니다.
하지만 이것도 우리가 찾는 헌신적인 사랑은 아니듯 싶습니다.
의무를 다 하는것이 사랑이 되지는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찾아 가는 길은 너무나 힘들고 외로운 길입니다.
이하 글은 제가 남긴 답 글입니다.
이웃을 섬기지 못하고 예수 닮은 모습이 없는것 같은 대 다수의 교회와 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은 수긍이 가는군요.
하지만 님도 예루살렘 입성의 때를 맞추어 예수를 이스라엘의 세상왕으로 세우려는 -- 그래서 그들 스스로의 요구를 관철 시키려는 민중들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소수이지만 신뢰의 기회를' 보여주는 교회 공동체가 그렇게 일부라도 있었던 것은 알았다면 그 속에서 사랑과 진리를 찾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는 민중의 외면을 받았고, 제사장들의 이권에 동조 하지 않아서 처단 됐습니다.
복음은 늘 역사 속에서도 소수의 힘 없는 양심 속에 존재 했습니다.
그걸 아는 님이 시라면 제사장이나 다름 없는 다수 교계의 지도자들을 부추겨 투쟁에 앞장서라는 이 어거지 강요가 되지 않을... 또 다른 비아냥 거리임을 이미 아시고 있는것은 아닙니까?
다수 종교인들에게 민중의 이해 관계를 기대 할 수는 없는 겁니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들은 처음부터 목적하던게 달랐을지도 모르니까요.
땅 바닥에 침 뱉기는 성질이나 돗구는 헛개비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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