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하나님은 우리에게 인생 100년의 시간을 왜 주신것인가? 왜 우리는 이 꿈 속같은, 때론 고통과 역경에서 눈물 지어야하는 이 상황에 계속 노출되어야 하는가?
그는 여기에서 무엇을 건지시려는 것인가?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구원 받은 것에만 집중하면서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에는 너무나 등안히 하는 듯합니다.
그는 분명 이 삶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가진 영혼을 얻어가시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이 세상 인생들을 통하여 천국의 상속자들을 구분하고 가르치고 그들의 자유로운 선택과 회심하는 고멜의 사랑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이것이 인간과 하나님 모두에게 시간이 필요한 이유일 것입니다.
요한복음 18장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 왕국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 만일 내 왕국이 이 세상 것이라면 내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다인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이다. 내 왕국은 결코 이 세상 것이 아니다."
100년도 되지 않는 이 인생에 혹시 아쉬울 것이 있을까봐 예수님의 이 말씀을 다 알고서도 은근슬쩍 타협하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위에 말씀을 하시고 십자가로 올라가시게 됩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잡아온 군중에게 다시 나아가서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죄도 찾을 수 없다라고 했지만 그들은 예수의 죽음을 원했습니다. 유월절 사면 죄수로 놓아 주려고도 했지만 그들은 차라리 살인자 강도를 풀어주고 예수를 못 박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조금만 빌라도 앞에서 협조적으로 말했더라면 십자가 형을 받지 않았을 지도 모릅니다. 아니 마음만 있었어도 정말 종들로 싸워 이기게도 할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확신하건대 예수님은 십자가에도 오르시기 전에 이미 절망적인 죽음을 느끼고 계셨을지도 모릅니다. 육체의 죽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어린양 신부에게 외면 당하는 그의 사랑이야 말로 그가 감래할 수 밖에는 없는 무서운 죽음의 고통이었을 겁니다. 예루살렘 성소의 보좌가 누구의 것입니까? 영접 받고 경배 받을 이름이 무엇입니까? 하지만 그는 오히려 배척 받았고 내어 쫒기고 광야를 떠도는 집 없는 가난한 전도자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가난한 이를 섬기고 병든자들과 함께했습니다. 그는 보좌의 영광을 바라고 온 것이 아니라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생명을 선물하시기 위해 온 것이고, 어린양 신부의 사랑을 찾아 온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생활 하면서 이미 구원에 대한 말씀들을 연거푸 아주 많이 들었습니다. 온통 구원 얘기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더는 신경 쓸 것이 없는것 같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구원이라는 것이 마치 예수님의 옆자리를 원했던, 몇몇의 제자들이 상상하던, 우리 입맛에 맞는 그런, 나 좋은 것은 아닐까요? 종교개혁이후 많은 신학자들과 고매한 교회 지도자들이 구원에 대해 매우 깊이 있는 역구를 (자칭) 잘 해놓았습니다. 마치 적어도 믿노라고 시인하고, 교회 생활을 모범적(?)으로하는 신자들은 구원의 법칙에서 예외 없이 낙오되지 않을 것 처럼 독려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철저하게 연구를 잘 해 놓아서 마지막 날에 예수님이 심판하시다가 피곤하시면 잠시 쉬시려 자리를 좀 비우셔도 '예수 천당 불신지옥'이란 구원 원리만 갔다대면 심판이 계속 진행 될 수 있을것 같습니다. 아니면 교회 별로 예수님 쉬시는 동안 당회장 목사나 본당 신부가 대신해도 아주 자비로운 심판이 될듯합니다. 인격적인 심판이 아니라 자판기 콜라 판매 같은 심판이군요. 모두가 심판 받을 우리 죄인들 주제로서 분명하게 말 할수 있는 심판 날의 상황은 오직 예수님만이 심판주이시라는 겁니다. 아무리 잘난 신학이라도 고작해야 구원의 조건을 예상해 본 것일텐데 내 생각이나 내가 바라보는 성경에 대한 관점으로 다른 사람들에 대해 지나친 정죄를 하는 것 이야 말로 오만한 짓이 아닐까요?
이런식으로 온통 시간을 허비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이 바라시는 어린양 신부로서 그의 사랑에 응답하는 것에는 많은 시간 등안시하고 살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에서는 이제 여러분은 지상의 남은 생애를 인간의 욕정을 따라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라고 써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있습니까? 곧 예배하는 삶이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의 예배를 기뻐하고 계실까요? 우리의 예배는 진정 무엇입니까? 일주일의 시간 중에 정해진 장소와 시간에 행하는 종교의식을 지칭하는 하는 것으로 너무나 철저하게 정형화 되어있습니다. 인간이 정형화 하는 것중에 죄된것이 아주 많습니다. 홍해를 건너게 해준 하나님이 이 송아지다라고 한다고 하나님이 이해해 주셨습니까? 그리고 그 예배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세태를 따라 ... 아니 세상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세태를 주도하며 세상 것에 더 연연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제가 어느 섬 지역에 일을 갔습니다. 일하는 이틀내내 친절과 섬김으로 대접해 주신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마지막에 목사님과 부목사님까지 한자리에서 함께 하며 저녁을 대접 받게 됐는데 목사님과 부목사님께서 이 장로님이 하나님께 복을 많이 받아서 큰 아들이 공부도 잘 했고 외국유학도 다녀와 좋은 직장에 다니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제가 이렇게 말 했습니다."아!! 그렇습니까? 그 형제 혹시 찬양단 중에 있던 그 친구 아닙니까?" 라고요... 지금은 일이 바빠서 교회에 못나오고 있답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나라도 이 땅에 것이 아닙니다. 천국과 세상을 함께 탐하면서도 예배를 하고 있다고 변명하게 된다면 신랑이 어디에서 신부의 응답하는 사랑을 볼 수 있겠습니까? 예배를 우리 식대로 나름대로 만들어 놨지만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 종교 의식을 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까? 우리가 개신교 맞습니까? 이런 예배가 우선하고 중요한 것이라면 천주교나 유대교가 더 그럴싸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아주 많은 부분 이웃과의 관계에게서 용서하고 섬겨주라는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영접받는 동일한 경우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몇번 말해서 교회 나오는 사람만 우리 이웃은 아니었니까? 우린 심지어 옆 교회와는 경쟁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주일 학교는 겨우 나오는 학생 수 맞춰서 선생 배정하고 그것도 일주일에 한두시간 가르치느라 신앙교육이 거의 안되는 실정이지만 가슴 아파하거나 발을 동동 거리는 집사들이 어디 있습니까? 어느 누구의 발을 씻기는 사람이 결코되지 않고 세상 어디서나 꼬리되지 않고 머리되어서 남이 내 발 씻겨지는 상황이 반드시 되도록 온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자 안수 기도를 청합니다. 학교 선생님들이 평생 일 한후에 연금 받는 상황 될 때까지 주일 학교는 언제까지 겨우 여건되는 미혼 남녀들의 무보수 헌신에 의존할 것입니까? 그러고서도 "요새 것들은 하고 놀것 많아서 교회 안나온다" 라고 비아냥 거리는 어른들이 있습니다. 신경 쓸 가치가 없는 것이겠지요. 걔네들이 안정된 직장 생활만 한다고 해 보십시요. 담임 목회자가 찾아가면 신방하고 권면할 것입니다. 교회내에서도 당장 유용하지 않은 집단은 외면 당하는 것을 여러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죄를 짓고 사는 것과 교회가 교회 권세를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행위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니지만 선한 삶의 행위를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 처럼 말하고 공식적으로 교회가 하나님의 뜻하심을 훼손해서는 않됩니다.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행위와 그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선교와 함께 빼 놓을수 없는 예배입니다.
전 십자가 일을 하고 있지만 십자가나 예배당 건물이 중요하다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둠을 비추는 네온 십자가는 상징 일 뿐이고 예베당 건물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필요한 것에 불과합니다. 전 세계에 교회나 성당 건물이 한개도 남아 있지 않고 다 무너져 버린다 한들 하나님의 기쁨이 그 무너진 벽돌 더미 때문에 줄어들 것입니까?
우주가 공허하게 비어 있는 것이 보입니다. 이제 천국은 분명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과 더불어 영원하고 무한하고 영광스럽게 확장되어지도록 채워 나가실 것입니다.
누가 어린양 신부의 배필로서 그 사랑에 응답 할 것입니까? 이 어두운 세상은 그의 신부를 보고 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의 신부라고 자처하는 것으로 믿음을 줄 수는 없습니다. 세상도 그녀가 그를 사랑하는 것인지 그의 조건을 사랑하는지는 알고 있는 듯 합니다. 벌써 자처하는 그녀를 보고 거짓 신부라고 조롱하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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